간화선과 조사선은 분리되어야 한다 잡담

간화선과 조사선은 분리되어야 한다. 간화선의 화두가 조사선의 공안에서 포맷을 따왔지만 화두와 공안의 적용법은 서로 미묘한 차이를 갖는다.

조사선의 공안은 본질적인 문답으로 납자의 시선을 생각에서 생각의 바탕에 두도록 하는 탓에 강렬한 문제의식과 의구심이 초점이지만 간화선의 화두는 생각의 흐름을 끊어내는, 생각의 공백을 일으키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간화선의 화두는 순간적으로 생각의 흐름을 단락 단락 끊어내는 용도인 탓에 화두에 대한 의심이 단순히 생각의 흐름을 중지시킬 수 있을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오히려 간화선의 화두는 순간적으로 참구할 수 있는 용이성이 주가 되는데, 때문에 ‘무’자 화두가 간화선의 대표 화두가 된다.

간화선의 화두는 뿌리없는 나무이다. 조사선의 공안이 의구심을 통해 의식의 전환을 일으킨다면 간화선의 화두는 생각의 공백을 만들어 의식의 전환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조사선의 공안이 풀어내야 할 숙제, 타파해야 할 과제의 영역이라면 간화선의 화두는 화두를 통한 ‘모름’ 그 자체가 목적이다. 조사선의 공안이 납자의 시선을 자기 자신의 바탕으로 돌린다면 간화선의 화두는 이 '모름'을 통해 생각을 끊어내고 제거하여 의식 상에서 ‘생각의 공백’을 만드는 데에 목적이 있다. 때문에 간화선의 화두는 그 자체가 수단이고 목적이며 그 뒤에 숨은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는 참구는 의미가 없게 된다. 간화선의 화두는 뿌리없는 나무인 것이다. 

간화선 수행자들이 많이 헤매는 이유가 이 지점이 아닐까 싶다. 간화선을 조사선의 공안에 입각해 접근하는 시점은 간화선의 화두를 ‘모름’을 일으키는 화두가 아닌 풀어야 할 과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서 접근하여 생각을 제거하는 것이 아닌 생각을 일으키는 역효과를 발생시킨다. 간화선은 화두를 통한 ‘모름’이 흘러가는 생각에 순간적인 중지를 일으키고 이어서 화두라는 하나의 관념만이 남아 여타의 생각들을 제거하여 의식 상에서 생각의 공백을 만들어 낼 때 거기서 곧 깨어남의 전환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사선적 관점에서 간화선의 화두를 접근하면, 이뭣고를 제외하고선 강렬한 문제의식, 내재된 의구심이 적용할 수 있는 화두가 많지 않은 탓에 (실질적으로 자기 자신의 문제와 천년전 조사들의 이야기를 밀접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를테면 조주에게 개의 불성을 묻는 구자무불성 공안에는 이미 개의 불성을 묻는 납자의 히스토리, 즉 그 납자의 심도있는 문제의식과 강렬한 의구심이 전제되어 있었다. 오늘날 무자, 마삼근, 정전백수자를 참구할 때에 당대의 동일한 문제의식과 의구심을 갖을 수 있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조사선적 관점에서 수백년전의 공안을 참구하는 것은 나의 문제가 아닌 타인의 문제를 참구하는 것과 다름 없어 진정한 참구로 이어지기 어렵다.) 주작심으로 이어지며 주작심은 곧 생각으로서 화두를 참구하는 알음알이 사구참구의 형태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알음알이의 사구참구는 생각을 확대 재생산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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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선의 관점에서 공안을 참구한다면 ‘이뭣고’가 가장 적당하며, 그 이외에는 직접 선지식과의 독참과 문답을 통해 얻는 의구심으로 자연스럽게 의심하는 것이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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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선은 전적으로 타력구제이다. 조사선은 ‘나’의 힘으로 깨어나는게 아니라 선지식의 도움으로 깨어나게 된다. 이것은 깨달음, 깨어남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깨닫지 못했다면 ‘나’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 노력도 결국은 ‘내가’ 하는 것이 된다. 에고를 제거하고 무아를 획득하려는 그 노력을 결국 에고가 하고있는 것이다. 무명 속에서 ‘내가’ 하는 모든 수행이 스스로 ‘나’를 더 견고히 하는 이 역설로 인해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의 모든 수행은 본질적으로 무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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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수행이 무용한 와중에도 간화선이 유효한 까닭은 무엇인가? 간화선은 ‘나’라고 하는 에고가 ‘나라는 생각’이라는 전제 하에 출발하기 때문이다. 정말 ‘나’라는 실체가 있어 그 ‘나’를 지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고 하는 것이 다만 하나의 ‘생각’임을 발견하고 그러한 ‘생각’과의 동일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다. 간화선은 ‘생각’을 바탕으로 수행하는게 아니라 그 ‘생각’을 향해 돌아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으로 화두를 참구하고자 한다. ‘생각’으로 의심하려 한다. 그러나 간화선은 ‘의심’으로 생각을 끊어내는 작업이다. 화두로 ‘생각’의 공백을 만드는 작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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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본질은 돈오이다. 왜 그러한가? 깨달음은 이전부터 이어진 ‘나’의 인과적 결과가 아니라 이전부터 이어오던 ‘나’가 사라지면서 발생하는 갑작스런 인식의 전환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사고와 같다.
이러한 깨어남, 깨달음의 속성을 고려하면 조사선의 타력구제 방식인 ‘직지’는 깨어남에 있어서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필연적인 방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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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선은 언하변오다. (언어로서 언어를 여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조사어록, 일대기 속 사례들로 인해 납자들은 언하변오 이전의 강렬한 문제의식을 무시한다. 그냥 무심히 지내다가 어느날 문득 조사의 한 말씀에 몰록 깨달았다고 여긴다. 또 그러한 깨달음의 방식은 상근기의 전유물이라 여긴다. 그러나 그렇게 몰록 깨닫기 까지 깨닫고자 하던 구도자의 고뇌, 생사에 관한 강렬한 문제의식은 생각지 못한다. 그가 눈밝은 조사로부터 언하에 몰록 깨어나기 전까지 수차례 겪은 시행착오 또한 알지 못한다.
실제 조사선은 선지식이 납자를 앉혀두고 날이면 날마다 법문을 하고 독참을 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그러한 방식에 안일해질 때 쯔음 선지식은 방과 할 등 격외구를 통해 예기치 못한 충격을 주기도 한다. 조사선의 깨어남이 언하변오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언하변오 하기 까지에는 강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선지식을 수차례 참문하였던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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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선은 장황하게 흐르는 생각 가운데에서 무념을 알아채지만 간화선은 생각을 끊어내고서야 무념을 알아챈다. 이 결정적 차이로인해 간화선은 생각을 적대시하고 선정주의와 체험주의로 흘러가는 경향이 다분하다. 조사선으로서의 깨어남은 일상 속에서 낯설음을 목도하는 것으로 이뤄지지만 간화선은 일상을 제거한 다음 낯설음을 목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