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불교

라마나 마하리쉬의 일생동안의 가르침에서 이"나는 누구인가?"의 간단한 가르침은 그의 본격적인 첫 가르침이자 주요가르침인 자아탐구방법의 전체내용이다.
이 첫 가르침 이후에 특별하게 가르침의 내용이 변동된 것은 없고, 계속 이 "나는 누구인가?"의 자아탐구 수행을 기본으로 이에 대한 보충적인 가르침만 펼쳐 오셨다.
그의 가르침에서 수많은 방문자들에게 오직 일편단심 "나는 누구인가?"하고 나를 탐구해 보라고 권하셨다.

"나는 누구인가?"의 가르침을 자세히 뜯어 보면,
맨처음에 몸과 마음과 생기(生氣)와 5가지 감각기관과 5가지 행위기관등이 내가 아니라고 부정하여 제외하고 나서
이모든 것이 아니면,그러면,나는 누구인가? 하고 자신한테 묻는 방법이다.
마하리쉬는 이모든 것이 나가 아니라면,나는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질문에 마하리쉬의 직접 대답은 "내가 존재한다"는 자각입니다.

상기 세구절이 마하리쉬의 자아탐구법의 핵심내용이다.
이제 다시한번 간단하게 되짚어 보자.

1) 몸과 마음과 생기(生氣)는 내가 아니다.

2) 이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인가?"

3) 나는 "내가 있다"는 자각(自覺)이다.

자아탐구법은 비이원론을 기초로한 수행법이다.
즉, 실제(진리)가 아닌것은 처음부터 구별하여 제거해 버리고,
오로지 실제인 참나에만 일심으로 집중하는 수행법이다.

그러면 실제와 비실제를 어떻게 구별하는가?
그방법이 바로 지혜의 길이라고 하는 지성적 방편이다.

비실제란
자신의 몸과 마음부터 시작해서 현시된 모든 것을 비실제, 환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실제란
이러한 에고의식에서 나타난 비실제들을 전부 삭제하고 나서 남아있는, 모양도 없고,색갈도 없으며,특성도 없고,크기도 없고,위치도 없는,볼수도,느낄수도 없는, 태어나지도 않고,사라지지도 않는, 항상 있는 그대로 변함없이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을 말한다.

위의 1)번에 몸과 마음,생기(生氣)는 내가 아니다. 하는 것은 에고의식을 말하며, 동시에 에고의식에서 나타나는 시간과 공간 속의 이 현상세계 전체를 의미한다.
이 1)번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전에 진리의 분별지혜를 확실하게 이용하여 실제와 비실제가 무엇이라는 것을 이해해야한다.
육체와의 동일시가 여기서 지혜의 칼로써 잘라내야한다.
육체 동일시에 의한 에고의식도 지혜의 불에 의하여 전부 불살라 버려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자아탐구법 수행자들은 말로만 "몸도 내가 아니다, 마음도 내가 아니다"이런 식으로 두어번 되네이고, 그럼 나는 누구인가?하고 자신에게 묻는다.
이렇게 무의미하게 마음 속으로 아니다,아니다,해가지고는 지혜의 분별칼이 될 수가 없다.
적어도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니다 라고 제거할 때는 이 현상세계도 같이 제거가 되어야 한다.

1)번은 날카로운 지혜의 칼로 진아가 아닌 것은 모두 구분해서 베어내야한다.

그 다음에야-

2)의 "나는 누구인가?"의 탐구의 문으로 들어가야 원래 마하리쉬의 원본 가르침과 일치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완벽하게 분별하고 탐구로 들어가기가 어렵다.

3.

1) 육체와 감각기관, 마음, 生氣는 내가 아니다.
2) 이것들이 내가 아니라면, 그럼 "나는 누구인가?"
3) 나는 "내가 있다"는 自覺이다.

자아탐구법은 위의 세가지로 요약 될 수가 있다.
실지 수행할 때는
1)번의 육체와 마음,생기가 내가 아니다,라는 대목은 사전에 그내용을 충분히 숙지 하고 이해해야하며, 마하리쉬의 말씀을 무조건 믿는 방법도 있지만,
오히려 스스로 논리적인 현상관찰을 통해서 그개념내용의 합리성을 긍정해서 완전히 확신이 굳어져야 한다.
그렇게, 육체와 마음이 내가 아니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수긍을 해야,
그다음에 "자- 이모든 것이 내가 아닌 줄 이제 이해는 했는데, 그럼 나는 뭐야?" 이렇게 자연스럽게 자기자신에 대한 질문이 자동으로 따라오게 마련이다.
3)번의 마하리쉬가 해답을 준 것처럼 말씀하신
나는 "내가 있다"는 자각(앎)이다, 하는 말씀은 언뜻 보면 "해답"을 말씀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해답이라기 보다는, "나는 누구인가?" 탐구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한가지 힌트를 주신 것이다.
즉, "나는 누구인가?" 하고 내면을 향해 물을 때에 "내가 있다"는 생각이나 느낌을 탐색하여 그것을 따라가 그것이 나온 근원에 도달하면,
"내가 있다"는 느낌이나 생각이 "내가 있다"존재앎 자체에 합일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따라서 실지 수행상에서는 자아탐구의 "기본요령"으로써 길잡이가 될 수가 있고,
개념상으로는 진아탐구의 최종 목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지 수행중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는 어떤 답도 있을 수가 없다.
만일 이 물음에 의식상의 어떤 개념적인 답이나 의식의 반응이 나온다면 그것은 잘못된 수행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해답을 포함하고 있다.
그해답이라는 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자체가 사라져 버리는 상태를 말한다.
물음자체가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은 그 묻고 있는 개인성의 "나"가 사라져 버린다는 말이다.
묻는 "나"가 사라져 버렸는데, 거기에 딸린 의문도 같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너머로 들어가는 것이다.
불교의 화두선도 마찬가지다.

소위 화두를 깨친다는 것은 화두의 "의문"이 풀어진다는 것인데,
그것이 화두자체가 사라진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화두수행하는 "나"가 사라진다는 말이다.
화두를 들고 있는 그 의문하는 수행자(개인성)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개인이 들고있던

화두의문도 사라지는 것이다.
이 화두선의 경우에는 화두의 의심 자체가 그 개인성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어야지,
만일 의심 따로, 수행자 따로 두수행을 한다면 천년을 수행해도 화두는 깨치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 화두선 수행의 중요한 요점 중의 하나는 화두수행하는 "나"가 화두의 의심덩어리(의증)와 완전히 한덩어리가 되어서 의심자체가 되어야지 성공가능성이 보여질 수가 있다.

앞서 이야기 하던 자아탐구법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나는 누구인가?"라고 자기내면에 묻는 질문은 그 질문자체,??? 이 물음표 자체만이 답이 될 수가
있다.
의문 자체가 답이다.
만일 마음 속에서 어떤 마음의 반응이나 직관적인 어떤 영감같은 것을 얻을려고 하면 그건 잘못하는 수행이다.
오로지 의식 넘어로 너어가려는 의심만이 연속해서 유지하고 있어야 된다.
앎(의식)과 모름(의식너어)의 뒤섞인 경계선이 바로 이 의심속에 있는 것이다.
이 경계선에서, 이 의심속에 계속 유지하고 있으면,
그 역동성의 의심 소용돌이 속에서 점점 "나"라는 개인성이 녹아지고,
동시에 그 의심덩어리를 주시하는 주시자는 점점 의심덩어리와는 따로 떨어져서 분리되어,
결국에는 의심 소용돌이 속에서 "나"가 녹아지면 화두를 깨치는 것이고,
전체 경계가 사라지는 "내가 있다" 순수앎이 되며,
동시에 그것을 주시하는 주시자인"내가 있다"의 순수존재의식과 공진되어,
순간적으로 "내가 있다"는 앎이 "있음"에 합일되는 자각(공진)이 발생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아탐구법에 대한 대략적인 수행구조를 살펴보았다.
다음회에는 세부적인 수행측면을 다루어 보겠다.
즉, 1)번의 육체와 마음,생기는 내가 아니다. 하는 전제개념을 여러가지 가르침 실례를 들어가며
충분히 개념만이라도 이해될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해 보기로 하겠읍니다

4.
육체와 감각기관,생기(生氣) 마음은 내가 아니다.
우선 라마나의 가르침을 공부하기 전에 라마나의 깨달음의 체험과정을 잠간기록을 통해서 살펴 보고자 한다.
라마나 마하리쉬가 열일곱살의 소년시절에 그는 평범한 소년에서 성인으로 변모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전혀 예기치 않은, 따라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강렬하고 불가사의한 체험이었다.
다음은 라마나가 직접 제자들에게 얘기해 준 내용이다.

내 일생을 완전히 바꿔놓은 그 거대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내가 영원히 마두라이(그의 고향)를 떠나기 6주전쯤이다.
그것은 너무나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집의 이층방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
나는 전혀 아픈 데라곤 없었으며 그날도 건강에 전혀 이상이 없었는데,
갑자기 매우 강력한 죽음의 공포가 나를 엄습해 왔다.
그 공포를 느낄만한 신체적인 이유는 전혀 없었으며,
나는 왜 그공포가 생겼는지 그이유를 따져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곧 죽을 것 같다>라고만 느꼈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의사를 찾아가 봐야 되겠다던가, 윗사람 또는 친구들과 상의해 봐야 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만 되겠다고 느꼈다.

그 죽음에 대한 공포는 나의 마음 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일렀다.
" 자, 죽음이 왔다.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육체는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죽음의 장면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나는 실제감을 느끼기 위해서 내가 시체가 된 것처럼 생각하면서
팔다리에 경직현상이 나타난 듯이 팔다리를 쭉 펴서 뻣뻣하게 하였다.
숨을 죽이고 입술을 꼭 다물고서 아무 소리도 입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자- 됐다" 나는 혼자 말했다.
"이 육체는 죽었다. 이육체는 화장터로 옮겨져 장작더미 위에서 재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이육체가 죽는다고 내가 죽는 것일까?
이육체가 과연 나일까?"
육체는 고요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때, 육체와는 별개의 강력한 내 존재의 힘을 느꼈으며,
내면에서 울리는 <나>의 소리를 느꼈다.
" 나는 이육체를 초월한 초의식이다.
육체는 죽어도 육체를 초월한 이 의식은 죽음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나는 바로 이 불멸의 초월의식이다"

이 모든 과정이 생각을 따라 전개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진리로서 섬광처럼 느껴졌으며
매우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그 <나>는 매우 실제적이었으며 그상태에서의 유일한 실체였다.
그리고 나의 육체와 연관된 의식적인 모든 행위는 그 <나>에 집중되었다.

그이후로 계속 그 <나>, 즉 진아는 강력한 힘으로 스스로에게 초점을 맞추었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또 이진아에의 몰입상태는 단 한순간도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다른 생각들은 악보의 음표들 처럼 나타났다가는 사라져 갔지만,
이<나>는 마치 악보의 오선처럼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육체가 말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다른 일을 할 때에도
나는 여전히 이 <나>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체험이전에 나는 나의 <참나>를 전혀 알지 못했으며 의식적으로 진아에 끌리지도 않았었다.
또한 그것에 대한 직접적이고 확실한 흥미도 없었으며 그안에서 영원히 살겠다는 생각은 더욱이
없었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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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본 바와 같이 라마나는 17살 소년시절에 육체의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오히려
육체가 죽었다고 상상하므로서, 그육체의 죽음과는 상관없는 또 다른 <영원한 나>를 알게 되었다.

라마나 마하리쉬 뿐 아니라 세계 모든 종교와 수행체계는 바로 이 육체를 자신으로 잘못 확신하고 있는 육체 동일시를 벗어나기 위한 가르침이다.

특히 비이원론의 정신수행체계는 수행의 기초개념이 바로 육체와 감각기관에 연관된
의식과 현상세계는 모두가 허무한 꿈같은 마야(환상)라고 단정지어서 무시해 버리고 ,
오직 실제인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는 보이지도 알수도 없는 의식의 바탕을 실제로서 참나라고 확신 하는 것이다.

그러면 보통 개인의식을 가지고 있는 수행자들은 어떻한 자세로 이 실제,비실제를 구분하고, 어떠한 방법으로 오직 실제인 참나만을 향해서 수행을 해야 하는가?

우선 첫째는 라마나 마하리쉬 같은 큰성인들의 가르침을 표준으로 굳은 확신을 가지고 믿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실은 꼭 라마나 마하리쉬 뿐 아니라 역사상에 나타난 모든 깨달은 사람들이 모두 비슷한 가르침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어떤 특정인의 개념을 믿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다음에 실제와 비실제는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비실제란 바로 육체와 연관된 마음에 나타난 이세상 모든 것을 비실제라고 보면 된다.
그것은 바로 내 육체로 인해서 감각기관에 나타나는 모든 삼라만상의 현시내용과 그 현시내용을 나타내게 해주는 마음자체, 나라는 생각이 모두가 비실제,즉 허무한 환상과 같은 개념 뿐인 것이다.
이 연재글의 첫장인 의식이란 무엇인가?하는 내용전부가 바로 이 실제와 비실제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한 기초개념 설명이었다.
의식에는 동적 파동 의식과 정적 파동의식이 있다고 했다.
정적파동의식이란 존재기본의식으로서 파동적으로 시작점과 끝점이 동일한 안정된 파동상태를 말한다.
도형으로 표시하자면 시작점이 한바퀴 돌아서 끝점에 완전히 합치한 원상형태로서,
이상태의 의식은 일원화 상태와 비슷해서 주객이 없다.
항상 시작점과 끝점이 구분이 안되어 외부로 현시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상태가 순수 존재의식상태이다.
반면 동적파동의식이란 육체의 감각기관과 두뇌기관에 의하여 반사되어 나타난 불안정한 파동의식, 즉 시작점과 끝점이 완전히 일치하지 못하고,항상 어긋나서 불안정하게 흐르는 파동의식을 말한다.

그 시작점과 끝점의 어긋남 현상에서 주객의 이원화상태가 현시되는 것이다.

도형으로 이미지를 상징하자면 시작점이 끝점에 연결이 되지 못하고,
항상 빗나가는 와류형,즉 용수철같은 모양의 완전한 원형도 아닌 끝이 나타나지 않는 소용돌이 움직임 형태라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의식의 지금 현재 중심부인 정적파동 존재의식, 지금현재중심의식에서 항상 멀리 떨어져서 중심의식 주변으로 오지 못하고 항상 밖에서 맴돌고 있는 파동의식인 것이다.
파동의식이 끝나는 지점없이 계속 불안정하게 흐르므로 주객의 이원화상태로 현시되는 것이다.

이것이 끊임없이 흐르는 사람의 마음, 생각,이며 그기본형이 내가 육체라는 생각인 것이다.

따라서 이 육체기관의 감각작용과 사고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세상도 마찬가지로 파동의식의 그림들이 나타난 현시상태이며 결국 환상과 같은 활동파동의식인 비실제라는 것이다.

모든 현상세계와 생각, 육체,그리고 나라는 에고의식들은 모두가 동적파동의식의 나타남이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이모든 인지되는 비실제 중에서 그대표자가 바로 "나라는 생각"또는 "나라는 느낌"이라고 명확하게 가르쳐 준다.

이 "나라는 생각이나 느낌"이 바로 에고라는 개체의식인데. 이놈의 꼬리만 확실히 잡고 있으면,
그것이 스스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그때에는 저절로 참나를 알게끔 되어진다고 말한다.

이 "나라는 느낌 또는 생각"이 육체로 인해서 생긴 동적파동의식이며,
이에고가 내면으로 부터 나오는 순수진아의식의 빛을 차단해 버리므로써,
육체감각기관에 의해서 나타난 현상세계를 실제처럼 보이게 착각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보이고 있는 이현상세계와 육체등은 이 "나라는 생각" 즉 에고에 의해서 실제처럼 보인다는 것을 이해해야 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이 에고, "나라는 생각"이 과연 실제 수행상에서 어떤 것으로 나타나는 가를 관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에도 계속 '육체와 마음,생기(生氣)는 내가 아니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읍니다.

5.

본격적인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 자아탐구를 수행하기전에 육체와 감각기관에 나타난 세상, 그리고 육체를 작동시켜주는 생기, 마음등, 의식상에 나타난 현상이란 모두가 애당초 없었던 꿈과 같은 허깨비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사전에 이해하고 수행에 들어 가야지만 라마나가 말씀하신 올바른 자아탐구의 길이 될 수가 있다.
그 이해하는 방법은 마하리쉬 본인의 직접 말씀을 확고하게 믿어서 실천하는 방법이 가장 용이하다.
그 다음은 그 말씀과 비슷한 다른 수행체계들의 경전이나 가르침들을 조사해서 그 공통점이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확인을 한후에 그 사실을 확신하고 본격수행에 들어 가는 방법도 있다.
말하자면 불교경전이나 선불교 조사들, 노자 장자철학,인도의 각종 베단타와 요가 경전이나 다양한 성인들의 가르침들을 나름대로의 목적을 가지고 탐색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굳히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논리적인 사고 방법인데 의식이 빛의 비춤이라는 특성을 이해하여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 아는자와 아는 대상을 분별하여, 아는 대상과 보이는 대상을 배제해 나가는 방법인데, 탐구에 들어가기 전에 지성적인 방법으로 이해수준에서 충분히 가능한 방법이며,
마치 깜깜한 밤중에 작은 손전등을 들고 숲속의 오솔길을 스스로 찾아 가는 것과 비슷하다.
조그만 손전등이 바로 자신의 지성적 분별력이지만, 분별력이 확실해 짐에 따라 앞길은 점점 밝고 넓게 보이는 것이다.
비이원론적 수행법이 지성적인 길이라는 이유는 바로 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성적 분별력(지성적손전등)을 활용해 스스로 길을 찾아 나가는 방법이기 때문에 지성적 길이라고 한 것 같다.
이 지성적 방법이 비이원론 수행체계들의 원래의 기본 방법이다.
비록 처음에는 아주 작은 범위의 발밑에만 희미하게 비추어 주어서 분별하기가 어렵지만,

차차 지성적 분별력(자각력)이 예민하게 밝아지면
점점 주변을 넓게 비추게 되고, 그 넓어진 만큼의 지성적시야로 인해 비실제와 실제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게 되고 실질적인 자아탐구의 신작로를 달리게 된다.

이 지성적 앎이 최대한으로 넓어질때가 바로 자기자신이 空으로 느껴지는 "내가 있다"는 순수존재앎의 초기때이다.
라마나 마하리쉬의 말씀을 확고하게 믿는 방법은 스스로 대화록을 자세히 보면서 이해하는 방법을 추구하고,
두번째의 다른 비슷한 수행체계의 경전이나 스승들의 가르침을 참고하려면,뭐니뭐니 해도 불교 선수행 경전과 인도의 베단타 계통의 경전들을 보면 도움이 많이 된다.
원래 비이원론적 수행체계는 고대 베다시대부터 내려온 기본적 가르침이며 우파니샤드와 요가철학이 거의 이전통에 의해서 각자 분화되어 왔다.
불교의 석가모니 역시 베다의 전통에 따른 인도 힌두교에서 분화되어 나온 수행체계이며,그 기본 개념도 인도 고대 경전들과 비슷하다.
현대 흰두교에서는 아직 까지도 석가모니 불교를 단순히 힌두교의 한종파로 보는 경향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인도의 기타 요가나 명상체계들 중에는 아드바이타 베단타 계통의 명상체계가 많은데,라마나 마하리쉬의 가르침도 그 중의 하나라고 볼 수가 있다.
중국에서 발달한 선불교 역시도 중국의 노장사상과 인도의 베단타 철학이 적절하게 혼합되어 석가모니 가르침을 기본으로 해서 발달된 수행체계이다.

이 선불교에서 "돈오"라는 즉각 깨우침이 바로 "비이원론 자각"의 전형적인 가르침이다.

선불교의 돈오개념은 수행도 필요없이 육체도 마음도 세상도 없고,태어난 것도 죽는 것도 변하는 것도 고정된 것도 없고, 원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 "돈오" 즉각 깨우침이다.

사실 선불교의 6대 조사인 혜능의 "돈오"개념을 보면 아예 수행이라는 개념을 무시하라고 한다.
왜냐하면 수행이란 주시하고 비춰보는 것을 말하는데, 그 수행자체가 수행하는 자와 수행대상이 나누어진 주객 이원화상태를 더욱 조장하는 것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다는 비이원론적 즉각적인 깨우침만 가지고 그대로 무심으로 있어야지, 더이상 주시니 비춤이니 하는 수행이 필요없다는 것이 바로 돈오인 것이다.

말하자면 라마나 마하리쉬의 자아탐구 첫번째 실천인 실제와 비실제의 지성적 분별과정을 선불교에서는 아예 그것으로 완전 깨침을 목표로 한 것이다.
선불교의 핵심이 바로 이 돈오사상이다.

돈오돈수나 돈오점수같은 논쟁은 그 후의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방법론적 차이로 개념적인 의견이 달라서 논쟁하는 것일 뿐이고,
달마이래 이 "돈오"를 기본으로 선불교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고 현대까지 유지되어 오고 있다.
따라서 어찌보면 라마나 마하르쉬의 자아탐구법과 선불교 수행법은 비이원론적인 면에서 유사한 면도 많기 때문에 선불교의 유명한 조사가르침이나 어록들을 서로간에 병용해서 참고하면 도움이 될 수 있다.
반대로 화두선을 수행하는 사람도 라마나나 기타 베단타 경전들을 참고적으로 보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가 있다.
화두선은 그자체가 대단히 높은 수준의 진화된 수행법이라고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수승한 수행법을 현시대에 와서 그대로 7-8세기 조사들의 가르침 방법대로 변화 없이 배우게 한다는 것은 분석적인 의식수준이 발달된 현시대 일반 사회인들이 수용하기는 너무 벅찬 수행법이 아닌가 한다.

옛날과 달리 현대는 여러가지 학문과 과학개념들이 엄청나게 세부적으로 분화되고,과학적 논리성에만 의존되어 개개인의 두뇌들은 그 DNA구조가 이미 과거 10세기 전의 인간두뇌구조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고 볼수 있는데, 그러한 여건하에서 화두선의 실천 수행체계도 화두선 수행 이전에 어떤 특별한 예비 수행체계가 마련되어야지 올바른 정통간화선을 제대로 수행 할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서 한 말이다.
그정도로 간화선은 높은 수준의 근기가 필요하며,아주 고급 수행법으로서 쉬운 길이 아니다.
다음회에는 지성적 분별력을 가지고 실제와 비실제를 가려내는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기로 하겠읍니다.

6.
이 자아탐구 수행법에 들어가기 전에 예비 지혜,
즉 본격적으로 "의식"의 근원을 파고 들어 가기전에 이해해야 할 사항들은 바로수행의 목표 자체를 자기자신에게 확인하여 수행의길을 스스로 알려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이해해야 될 사항이라는 것이 바로 "육체와 감각기관, 생기,마음등이 내가 아니다"라는 사항이며, 이것을 확실히 이해하고 "나는 누구인가?"를 자기내면에 묻는다면 명확한 방향이 이미 정해져서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넓게 트인 넓은 신작로를 가는 것처럼 훤할 것이다.
처음에는 잘 이해가 안 가드라도 수행을 해 감에 따라 점점 마음이 고요해지면 의식이 맑아지고, 넓어지게 되는데, 의식이 맑아지고 넓어지는 만큼 이해의 깊이가 깊어지고 어느때 가서는 확신이 저절로 올때가 있다.
이렇게 확신이 오는 때에는 바야흐로 스스로 그개념들을 증명하겠다는 열망이 더 가열되어서 수행에 열정이 붙게되고, 결국 그것들을 실제로 체험하는 기회가 올수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상만사가 모두 꿈결이나 환상같이 비실제적 느낌을 느끼게 된다.
물론 그때 쯤이면 수행이라는 것은 그치고, 그저 조용하게, 소위 말하는 "있는 그대로" 있는
수행아닌 수행의 시절이 되는 것이다.
이제 육체와 마음, 이현상세계가 비실제라는 것을 이해해야 되는데, 그이해하는 방법의 예를 몇가지 들어보자.
비실제와 실제의 구분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나"와 "나 아닌 것"의 구별을 말한다.
여기서 나란 "참나" "진아" 이며 불교에서는 "무아" 이기도 하며,기본적인 절대상태를 말한다.

참나 이외의 모든 것은 비실제인 것이다.

참나인 의식의 근원만이 실제이며, 존재의식과 활동적인 파동의식이 모두 움직이는 파동형태의 의식으로서 고정되지 않은 의식이므로 비실제인 것이다.
실제란 영원이 변함없이 있는 것으로서 시간성 공간성이 없는 의식의 근원이며,
비실제란 이 파동성이 있는 항상 변하는 의식이며, 파동요소때문에 시간 변화성을 가지고 있다.
비실제란 실제에서 부터 나타나 보이는 것일 뿐이며, 육체가 나타나면서 육체의 감각기관을 매개로 해서 알려지는 것이고, 만일 육체가 없다면 그런 비실제들은 원래 없는 것이다.

비실제란 원래 없는 것인데,육체를 나라고 동일시 한 개인 의식상태에서는 그비실제가 실제처럼 착각되면서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수행자들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이 비실재라는 것이 어떤 것이며, 실제인 "참나"는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여, 비실제는 무시해 버리고, 비실제가 나온 근원인 참나만을 찾아서 비실제를 제거하는 수행을 해야 되는 것이다.

이제 약간의 과학적인 상식을 가지고 실제와 비실제를 구분하는 방법을 이야기해 보자.
의식은 옛날부터 햇빛처럼 "비춤"의 특성이 있다고 했다.
의식을 태양에서 비추는 빛에 비유해서 이야기 해보자.
태양에서 빛이 비추어져서 지구상의 온갖 생물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태양에서 비춘 빛은 온갖 생물 무생물의 모양과 색갈을 나타내 준다.
즉 온갖 삼라만상의 모양과 색갈이 제각각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은 빛이 비추어서 반사된 형태다. 빛이 없으면 색갈과 형태가 나타나질 않는다.
지금 노란 달맞이꽃의 그모양은 햇빛이 반사되어 그 반사된 빛이 눈으로 들어온 정보를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다. 햇빛측면으로만 생각하면 노란 달맞이꽃의 모양은 "반사빛" 자체다.

그런데 우리가 좀 더 과학적으로 세밀히 분석해 보자면, 달맞이꽃 모양자체는 반사빛이지만, 그반사빛 이전에 달맞이 꽃에 비친 입사빛(투사빛)은 보이지 않으므로 관심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주변의 밝음이 투사빛이 아니냐고 말하겠지만, 그 주변의 밝기도 사실은 땅에서의 반사빛이고,하늘공간에서 직접 나온 태양의 투사빛은 볼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 밖의 우주공간 한가운데서는 태양빛이 없고 완전히 검푸른 어둠 속에서 태양이 조금 크게 빛나 보일 뿐이라고 한다. 이때 보이는 것 조차도 반사빛이라 한다.
우주공간에서는 태양빛이 반사 대상물이 없을 때는 보이질 않는다.
지구상에서는 대기권과 가스층에서 햇빛이 반사되어 하늘도 푸르고 밝게 태양빛이 보이지만 이는 공기층에 의해 태양빛의 반사상태를 본 것이다.
우주공간내에서 어떤 반사도 없이 직접 태양빛을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태양에서 직접 나오는 빛은 전체 공간에 확산되어 퍼져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태양빛이나 별빛은 모두가 공기층에 반사된 형태의 빛 그림자를 보는 것이다.
이사실은 엄연히 과학적인 사실이다.
우리들의 눈과 의식으로는 태양에서 직접나오는 빛은 볼 수가 없고 항상 반사된 형태로 밖에는 볼 수가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이세상 삼라만상이 전부 태양의 반사빛 그림자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틀림없이 그 달맞이 꽃에 빛이 투사되었기 때문에 달맞이꽃모양의 반사빛이 나타난 것이다.
이세상 삼라만상의 모양과 색갈이 다양하지만 모두가 태양빛이 있었야 나타나며, 그태양빛이 비쳐서 반사된 빛이 모든 다양한 모양과 색갈인 것이다.
이제 달맞이꽃을 사진으로 찍었다.
사진에 나온 달맞이꽃은 예쁜 꽃모양이 그대로 사진에 나왔지만 사실 그 꽃모양은 반사빛일 것이다. 그 사진에는 투사빛은 나타나질 않는다.
달맞이꽃자체가 보인다는 것은 바로 그이전에 투사된 빛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만일 투사된 빛이 없었다면 달맞이꽃도 사진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투사된 빛은 사진 어딜 보아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사진찍는 순간에 달맞이꽃을 비춘 햇빛은 그 사진기 뒤에 있었음에 틀림없지만
보이지는 안는다.

이와마찬가지로 우리의 의식에 나타난 보이는
현상세계, 우리육체, 우리마음은 우리자신이 알고 있고, 느끼고 있다.
이런 보고 느끼고 알고 있는 것들은 모두가 의식의 반사된 빛 모양이다.
의식상에서 알고 감지할수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가 의식이 반사되어서 나타난 상인 것이다.
어디에 의식빛이 반사되어 이렇게 다양하고 무한한 모양들이 나타나는가?
우리 육체기관과 두뇌에 의식의 빛이 비쳐서 반사되어 보이는 것이 바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육체,마음, 이세상 온갖 삼라만상인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육체뿐 아니라 희로애락,생각의 움직임은 물론 이 우주, 삼라만상도 우리 의식의 반사된
변형상태(허상)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 반사된 다양한 모양들을 우리가 볼수 있고 알 수 있다고 치고,
그러면 그것들이 육체에 투사하기전의 순수의식빛은 어디서 찾는가?
그 원래 온 의식빛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의식상에는 없다.
그건 마치 달맞이꽃 사진의 투사빛은 안보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
모든 현상세계자체가 나타났다는 사실자체를 보고 느끼고 아는 그 "앎"의 기능이 바로 현상세계이전에 의식빛이 비추어 주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 "앎" 자체를 우리는 의식이라고 한다. 그 앎이 바로 비추어 주는 의식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앎의 빛이 어디로 부터 나오는 가, 그 근원을 찾아가야 된다.
개인의식에서 유일하게 참나의 발자국 흔적은 바로 이 앎의 느낌인데,
육체개인의식에서 이앎의 느낌의 기본바탕이 "나라는 느낌"인 것이다.
보통 개인들이 육체를 나라고 하면서 동일시하는 것은
이 앎(의식)의 빛이 육체에 걸려서 반사형태로 나타난 것을 "나"라고 한다.
그러나 개인의식은 "앎의 느낌"까지만 감지한다.
그 앎자체는 "앎의 느낌"과는 달라서 예민하지 않은 사람은 그 앎 자체를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앎의 빛은 육체를 지나 그이전에서 이미 비추고 있는 것이다.
보통 우리가 감지하는 "나라는 느낌"은 라마나 마하리쉬가 말씀하시는"나라는 생각"과는 아주 다른 차이가 있다.
보통 개인에게 있었서 "나라는 느낌"이란 육체가 있다는 육체의 감각느낌이다.
그러나 이 자아탐구법에서 라마나 마하리쉬가 말씀하시는 "나라는 느낌" 또는"나라는 생각"은
그런 개인의 육체감각이나 존재감각이 아니라.

우주전체와 자기육체,마음을 아는 앎자체를 말한다.
따라서 마음안에서 느끼는 내가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마음을 넘어선 곳에 있는 있는 "앎의 느낌" 넘어 "앎 자체"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현상세계와 정신감각을 배제하고 나서 그 넘어의 알지 못하는 의식상태를 "나라는 생각"이라고 라마나는 말씀하시는 것이다.

대부분의 구도자들이 이것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첫발짜국부터 잘못 방향을 잡아서 고생만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의 "나는 누구인가?" 탐구편에서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볼 예정이다.
앞서 의식을 빛의 반사특성으로 비유해서 이야기 해 보았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의식이란 우리가 보는 자세로 비유해 보자면
앞면 시선에는 보이며 안다는 의식이 펼쳐지고,
뒷쪽에는 안보이는 의식빛의 근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앞면의 보이는 의식내용물들은 비실제이고, 뒷면의 안보이는 깜깜한쪽은 실제가 있는 방향이라고 비유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앞면의 아는 비실제는 배제해 버리면서 점점 뒤로 물러나면서 앞면에 나타나는 보이고 느껴지는 것들을 자꾸 배제해 나가면서 뒤빠꾸해 가면,
결국 의식의 종착인 순수존재의식을 지나면 나라는 생각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순수나인 참나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석양이 뒤퉁수쪽에서 비추는 저녁무렵
긴 자기육체의 그림자를 앞에다 세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자기의 석양에 비춘 긴 그림자를 보면서 태양이 바로 내 뒤퉁수에 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듯이,
안보이는 의식의 근원을 향하기 위해서는 보이는 모든 그림자들이 나타나 있다는 것으로 증거를 삼아 깜깜한 뒤퉁수쪽을 향해서 의식이 나온 자리를 향해 찾아 가는 것이다.
또한가지 흔한 비유로서.

의식을 거울로 비유하는 방법도 있다.

즉, 거울자체에 비추이는 영상들은 모두가 반사된 상들이다.
거울의 반사된 영상을 보는 자는 거울 속에는 없고 거울 밖에 있다.
거울에 비친 영상들이 바로 우리들이 의식상에 보고 느끼고 아는 의식의 움직임들이다.
거기에는 우리들의 육체,마음,생기,희로애락,세상만사,나라는 생각이 다들어 있다.
그 모든 보이고 느끼고 아는 것들은 단순히 거울의 반사상(허상)인 것이다.
그러면 거울을 보며, 보는자인 나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의식의 거울 속엔 진짜 나는 없다.
나는 거울 밖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자신은 나를 볼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거울의 반사상을 본다는 사실자체가
바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알 수가 있다.
수행자들이 수행을 하면서 이 마음의 거울에 나타난 경험이나 어떤 현상(신비체험등)에 미혹되어 의식의 거울을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만일
자기 의식에 나타난 모든 경험과 이미지들이 이러한 거울의 반사상과 같이 허상이라는 것을 확실히 파악할때에 수행중에 마음에 나타난 어떤 희안한 경험이나 이미지에 집착하여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7.
아무생각이 없을 때에, 무심상태의식이 바로 자신인 것이다.
거울에 상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그것을 보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볼때(자각)가 바로 무심의 상태이다. 자기의 시선은 자기자신을 향해 있으므로, 거울면의 반사상(허상)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마음을 거울이라고 비유해 보자면
참나 입장에서 거울을 보자면 기존 개체 마음의 거울 표면 위에는 존재의식이라는 반투명 거울 하나가 더 덮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의식의 마음을 거쳐 반투명 거울인 존재의식을 거쳐야 참나를 만날 수가 있는 것이다.
존재의식은 개인의식의 마음과 절대진아와의 사이에 중간 연결다리와 같은 의식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육체개인의식들에게 이해시켜주기 위한 이야기일 뿐이고,
참나 입장에서는 파동형태로 분리된 존재의식이나 2,3차적 파동의식으로 분화된 개인의 마음등은 전혀 있지도 않았고, 있을 수도 없으며,있을 가능성도 없는 것이다.

오직 참나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어떤 대상을 본다는 현상에는 보는 대상과 보는자, 그리고 봄이라는 현상이 있는데,예를 들어 달맞이꽃을 내가 본다고 할때에 노란 달맞이 꽃은 대상이고, 보는 나는 주체인 것이다.
봄이라는 어떤 움직임이 대상과 주체사이에 관계가 연결되어 있다.
보는자, 보이는 대상, 봄은 같은 의식 범위 안에서 같은 의식의 움직임현상이다.이세가지 요소는 같이 한묶음으로 되어 있지만 육체라는 에고의식에 의해서 세가지 현상의 파동의식형태로 분해되어 개인의식에게만 나타내 보여지는 것일 뿐이다.
여기서 보는자는 자신은 볼 수가 없다. 자신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달맞이꽃을 본다. 첫번째로 눈이 꽃을 본다면, 눈은 주체이고 꽃은 대상이다.
다시 눈은 시각(육체)이라는 것으로 마음 속에 알려져 있다.
즉, 보인다는 것 자체로서 마음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경우에 마음이 주체가 되고 시각이나 눈은 대상이 된다.
다시 마음은 육체도 알고 있다. 따라서 육체자체도 마음의 대상이 된다.
그다음 마음은 에고의식의 대상이 된다.
에고의식은 육체를 나라고 알고 있는 개인의식인 것이다.
그다음에는 이 에고 의식은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의 대상이 된다.
이 존재의식을 라마나는 개인적 영혼이라고 표현한다.
이 존재의식은 진아인 절대의식(의식의 근원)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최종 주시자는 바로 참나인 절대의식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뒷걸음쳐가며 의식의 근원을 뒤퉁수 끝을 넘어서 안 보이는 미지의 나를 찾아가는 것이 바로 정신 수행의 행로이며 소위 깨달음으로 가는 여정인 것이다.
이번회에도 참나 탐구를 들어가기전에 예비적인 지혜에 대하여 좀 더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비이원론적인 수행체계, 즉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라마나의 자아탐구법과 불교 선수행. 기타 지혜명상법에서는 그 수행기본자세에 특별한 "봄"의 자세, 또는 특별한 "앎"의 자세를 잘 이해하여 그런 자세로서 수행을 유지해 나갈 필요가 있다.
특별한 자세라는 것은 한마디로 보는 자가 없는 "봄", 아는 자가 없는 "앎"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원래 주시나 관조가 이런 자세에 해당한다.
다른 말로는 전체적인 "앎" , 전체적인 "봄"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특별한 주시상태를 얻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할 사항이 몇가지 있다.

첫째는 보는자 자신은 전혀 자신을 볼 수가 없다.
아는자 자신은 전혀 자신을 알 수가 없다.
따라서 보는자 ,아는자는 의식상에는 없다.
그러므로 보는자, 아는자인 나는 전혀(의식상에서는) 알 수가 없다.

둘째는 의식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은 참나가 아니기 때문에 대상으로 보여질 수가 있는 것이다.
육체의 느낌, 마음의 움직이는 생각들, 육체밖의 세상만사등은 모두가 의식안에서
알려진 대상들 뿐이다. 이 대상들은 육체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나타나는 의식의
움직임 그자체인 것이다.
알려진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내(참나)가 아니고, 알려지는 대상일 뿐이다.

세째는 육체의 느낌을 우리는 알고 있고, 밖에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마음의 세세한
움직임을 알고 있다. 이 알고 있다는 것은 의식이 있는 한에는 변함이 없다.
이 의식,앎, 내가 있다는 느낌은 우리가 항상 변함없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에 있었서는 이"나라는 느낌"을 중심으로 육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의
움직임을 알고 세상을 안다.
그러나 개인들은 이 "내가 있다"는 느낌을 육체적 감각느낌만으로 제한해 버려서, 육체가
바로 "나"라는 관념에 묶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육체라는 한계내에서 자기의식(앎)안에 펼쳐서 나타난 이 우주삼라만상과
별개의 따로 떨어진 한개체라고만 생각한다.
"내가 있다"는 느낌이 한 육체로 한정되어 동일시 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육체적 개체의식이다.

네째는 이 "내가 있다"는 느낌은 육체로 인해서 생긴 의식이지만, 단순히 육체에 한정된 의식만이 아니라, 육체 밖의 우주삼라만상도 육체와 같이 동일한 수준에서 나타내준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육체가 있는지 알고 있지만, 동시에 하늘도 알고, 별들이 있는 줄을
알고 있고, 산과 도시들이 있는 줄안다.

우리의 의식, 즉 앎이란 이세상 모든 현상을 다 포용하고도 얼마든지 더 무한정하게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개인들은 자기의식안에 우주전체도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오
직 육체"일뿐이라고 동일화 하여 작은 육체느낌에 "나"를 한정시켜 버리는 것이다.

만일 나는 육체가 아니라 "의식"이라고 말한다면 모든 삼라만상을 포함하여 모든 현시
현상은 모두 의식이라는 그릇에서 변화하는 현상이므로, 의식의 그릇이 정말로 "나"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있다"는 육체의 느낌은 단순히 육체의 감각내용일뿐이고, 원래 "내가 있다"는 느낌
은 바로 이 우주적현상을 아는 그 "앎"자체가 "내가 있다"는 느낌인 것이다.
육체와 마음이 있는 줄 알고, 이우주전체 현상을 아는 이 전체의식이 바로 "내가 있다"는
앎인 것이다.
이것을 우주적 자아의식이라고도 하지만, 보통 존재앎, 존재의식이라고 한다.
의식적인 측면에서 나라는 것은 바로 이 "보편앎"이 "나"라고 부를 수가 있다.
나라는 것을 육체를 중심으로 하자면, 내가 육체적 개체가 되는 것이고,
나라는 것을 의식으로 동일시 하면, 내가 우주적 존재의식이 된다.

이상태가 바로 수행하는 개인의식이 소위 주시자라고 느끼는 보는자가 되는 것이다.
즉, 아무것도 없는 "무"나 "공"상태의 주시자가 순수 존재앎상태가 되는 것이다.
라마나 마하리쉬가 자아탐구법에서 "나라는 느낌" 은 바로 이 네번째 "내가 있다"는 앎을
이야기 하는데, 대부분의 수행자들, 특히 "나는 누구인가?" "이 뭐고?" 화두선을 하는 사람
들 중에는 세번째 육체적 나라는 느낌을 가지고 수행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만일 세번째의 육체느낌을 가지고 "나는 누구인가?"나 "이뭐꼬?"수행을 하게 되면
육체개인의식과 존재의식사이에서 맨날 왔다갔다 맴돌뿐, 존재의식을 훌쩍 넘어가지는 못
할 것이다.

현재 현직의 승려들 뿐 아니라 일반 구도자들도 이"이뭣꼬?"화두를 드는 사람
들이 대부분인데, 거의가 이 세번째 육체감각의 "나"를 가지고 수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냐하면 이 전체 의식의 비춤 구조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수행을 하기 때문에
이런 어이없는 일들이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그런 사실이 왜 잘못되어 있는지 조차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제 위에서 이야기한 특별한 봄, 특별한 앎이란 바로 이 순수한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에서
보는 입장을 말한다. 이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이 개인의식에 나타나면 앞에 대상이 비춰져서
"내가 있다"는 느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은 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순수존재앎(의식)상태이고,
"내가 있다"는 이 알수 없는 순수의식(앎)이 육체에 비춰져서 "내가 있다"는 느낌으로 육체존재감각이 나타나는 것이다.

마치 태양빛이 반사체가 전혀 없는 우주 한가운데 무한 공간에서는 반사될 대상이 없었서 무한한 공간내에서 펼쳐져서 확산되어 버려서 컴컴하게 우주공간의 허공으로 빛자체는 보이지 않지만,
지구표면 위의 우주공간과 지구 위에서는 지구표면과 공기층의 불순물에 태양빛이 반사되어 환하게 햇빛이 나타나는 현상과 비슷하다.
이렇게 알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존재의식이 바로 우리가 보통 의식하는 앎의 뒤편의 주시자인 것이다.
따라서 첫번째
보는자(주시자)는 전혀 알 수 없고, 볼 수도 없고, 모양도 없고, 크기도 없는 "나"가 바로 모든 것을 보고 알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한다.

이렇게 우리가 보고 느끼고 듣고 아는 모든 의식작용은 이 뒤편의 주시자인 존재의식이 있기 때문에 "앎의 느낌"으로서 의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는 것은 무한하고 말없는 앎일 뿐이라는 사실을 항상 자각하는 것이 바로 특별한 앎 또는 보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다는 사실을 예로 들자면 "모니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식하고 있다.
즉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니터를 보고 있는 사실을 아는 의식작용은 바로 이 뒤편의 주시자로 부터 비쳐져 나온 앎의식이다.

그 앎의식 이면에는 모양도 없고 형태도 없는 무한자가 바로 순수"내가 있다"는 앎인 것이다.

여기서 특별한 봄이나 앎이란 바로 그 "무한한 없음"자체로 모든 것을 되비쳐 보는 것이다.

자기자신이 이 "무한 공" 또는 무한 앎이 되어 대상들을 되비쳐 볼때에 대상들의 경계는 대낯의 달처럼 희미해지게 되는 것이다.(실제와 비실제의 분리)

옛선사들은 이렇게 무한 주시자로써 되비쳐 보는 것을 반조(返照) 또는 회광반조(廻光返照)하라고 말씀하셨다.

회광반조란 보는 의식빛을 뒤편의 무한공에 되비쳐서 전체적으로 주시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반조나 회광반조, 주시,관조 등은 모두가 자신이 전체 무한 앎이 되어 되비쳐 보는 것이지만, 의지를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다.이것은 자연적인 작용이 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특별한 봄 상태가 되려면 자기의 "전체의식"을 자각하여야 되는데, 그 부분적인 알아차림의 전형적인 수행법이 바로 불교 위빠사나 수행법이라고 볼 수가 있다.

여기서 다시 불교 위빠사나의 기초단계를 말할 수는 없고, 위빠사나의 경우는 호흡이나 행동 하나 하나에 알아차림을 주는 기초수행일 뿐이다.

다만 그 알아차림이 개인의식의 앎이 아니고, 전체 존재의식의 앎이라는 것을 어떻게 빨리 알아차려야 하는가가 중요한 것인데, 위빠사나 수행체계에서는 이에 대한 해설이 자세히 안나와 있다.

알아차림의식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알아차림 넘어의 비(非) 알아차림에 대해서는 최종적인 과정으로 밖에는가르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내가 있다"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과는 좀 다르다.
위빠사나 수행의 최종과정만을 단번에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즉, 알아차림 넘어의 앎을 알아차리고, 그넘어 "있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 비슷할 것 같다..
여기서는 "내가 있다"는 느낌을 계속 알아차리는 방법인데, 자기가 실질적으로 "있다"는 현존감과
이 육체밖의 모든 우주가 있다는 것을 아는 그"앎"을 전체적으로 캐취하여, 그 앎의 느낌 속에서
가만히 있는 방법이다.

다시 말하면 육체적인 나와 주변 환경전체를 아는 그 의식의 느낌을 주시하는 방법이 있다.

그앎의 느낌을 개발하면 점차 의식이 확대되는데, 이의식이 확대되어 무한하게 확장되면 앞서 말한 특별한 주시상태가 저절로 펼쳐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있다"는 앎으로 전진해 들어가는 길인데,이상태에서 라마나의 "나는 누구인가?"을 탐구하면 이상태에서는 즉시로 마음이 고요한 상태로 바뀐다.
다음회는 자아탐구 예비지혜의 준비 마지막부분으로 육체의 동일시 개념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해소하는가를 몇가지 수행체계에서 행하는 기법들을 예를 들어 가면서 이야기 해 보겠읍니다.

8.
이번 회에도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하기 전에 예비 준비단계로서 육체 동일시 개체의식으로 부터 벗어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육체와의 동일시라는 말은 육체를 "나"라고 잘못 알고 있는 의식의 착각현상인데, 사람이면 거의가 육체가 태어나면서 자라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지가 아닌 주변환경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의식에 주입되어 형성되며, 태어날때의 백지상태 순수의식에 덧칠해지는 의식의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육체의 동일시된 개체의식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은 육체자체가 나쁘다는 관념이 아니라,자기의 타고난 무한한 의식을 육체라는 한계지어진 개체에다가 제한시켜 버리고, 스스로 자신의 무한성을 좁은 한계의 유한성으로 축소시켜서,

전체성으로 부터 작은 개체성으로 의식을 전락시킨채, 개체성의 구속성과 부자유성으로 부터 탈출하기 위하여, 또다시 자유와 해탈을 갈망하는 부조리 행위를 계속 반복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원래 자유로운 무한성 의식인데도 스스로 한계성과 구속되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바로 원죄인 것이다.

따라서 이문제가 풀어지려면 "나"는 육체에 갖힌 마음이 아니라, 그넘어 의식이며, 더 나아가서
의식 이전에 의식이 나온 근원이라는 것을 담박에 알아차려야 한다.(돈오)

그런데 두뇌로 이런 사실을 잠간 이해한다 할지라도 수억겁동안 인간 세포 하나하나에 유전자로서 자기가 육체라는 의식의 메모리가 굳어져 있어서 지성으로 아는 것으로는 육체 동일시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따라서 이러한 전체와 별도로 떨어져 있다는 개체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방편)들이 바로 도라는 이름으로 정신수행,명상,좌선등의 어떤 예비행위가 나오게 된것이다.

이러한 육체동일시 자체를 확실히 지성적으로라도 처음에는 이해를 해 나가면서 수행과정에서 서서히 의식이 확장됨에 따라 동일시 관념이 점차로 엷어지면서 녹게된다.

이 육체 동일시 과정이 어느 한 순간 갑자기 녹게되면 그것이 소위 말하는 돈오 깨달음이다.

그러나 그러한 돈오 과정은 상근기의 타고난 사람(육조혜능 등)에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인 것 같다. 그래서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수행방편을 가지고 개체성에서 무한성을 지향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육체 동일시라고 하니깐 육체자체가 잘못된 것이며, 육체의 느낌을 없애야 한다고 자신의 육체를 죽이는 상상력으로 육체느낌을 없애는 수행을 하는 곳도 있는데,
이런 방법은 아주 편협된 관념으로 수행자들에게 의식의 부조화와 상처를 유발할 수 있는 소지가 많다.
원래 육체자체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다만 "나"라는 의식이 육체 속에 갖혀있는 마음이냐, 아니면 육체가 나라는 의식 안에서 나타난 것이냐,라는 사실을 잘 분별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식 안에서 육체가 나타난 것이라고 보면 "나"는 의식과 동일시한 것이고, 이때는 육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에서 벗어 날 것이다.
처음 나타난 것이 육체가 먼저 나타났느냐, 아니면 의식이 나타나서 육체가 그후에 나타났느냐하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해 놓아야한다.
이 글을 쓰면서 첫마디가 "나는 의식이다"라는 측면에서 읽으라고 권고한 것이 바로 이 육체의 동일시로 부터 벗어나기 위한 예비적 조치였다.
만일 육체가 나라는 관점에 서 있다면, 이세상 삼라만상과 "나"는 별도로 떨어져 있으며,나는 개체의식이 되어 모든 모양과 색갈,성질등 경계를 다 헤아리는 분별의식으로 별도로 떨어진 상대성 개체가 될 것이고,만일 자기가 오직 하나의 의식이라고 여긴다면 모든 모양과 색갈,성질들은 모두 하나의 의식의 변화상태일뿐이며, 따라서 세상과 나는 같은 하나의 의식이라는 것을 이해 할 것이다.

만일 자기자신이 의식일뿐이며, 그 의식의 순수상태에 접근해 간다면 모든 사물의 실체감이 사그러지면서 이우주세계가 마치 꿈과 같은 의식에 잠겨 있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자아탐구를 들어가기 전에 어떤방법이든 육체의 자기동일시를 완전히 녹일 수는 없다.
그러나 지적으로라도 완전이해를 하게되면 자기탐구수행의 진도가 휠씬 수월해 진다.
모든 수행법에서는 이 자기육체 동일시현상을 해소하기 위하여 이론적으로나 각종 수행방편으로수행자 자신도 모르게 그 방편을 자연스럽게 거쳐가게끔 유도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불교 입문시는 수계식과정과 예불의식, 염불의식,모든 기초 교육과정이 붇다에 귀의하는 과정인데, 이런 과정이 자신의 육체 동일시를 버리고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의식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불교 입문 뿐 아니라 모든 종교, 수행방편은 크든 작든, 눈이 띄든 잘 알아채지 못하든, 수행자의 육체동일시를 버리기 위한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
그 헌신의식이 바로 입문식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경전에 육체가 사대 , 즉 지수화풍(地水火豊)의 원소로 분해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그 분해 과정을 가지고 스스로 이미지 수행하는 곳도 많다.

예를 들어 티벳트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조장(鳥葬)을 지내는데 황량한 고산에 시체를 그대로 두어 새들이 먹게한다. 그과정을 가족들과 수행자들이 지켜 보므로서 육체의 무상함을 교육하는 것이다.
인도에서도 역시 이런 장례과정에서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그 요지는 바로 육체의 죽음을 명상함으로써 자신의 육체의 허무성을 이해하여 집착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한 수행인 것이다.

인간육체의 죽음에 대한 명상은 고대부터 여러가지로 비전되어 온 것이 많다.
티벳의 사자의서, 이집트 사자의서등 그중에 일반사회에 알려진 경전뿐만 아니라, 불교경전이나 기타 우파니샤드 등에서도 육체의 동일시를 제거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론이 많이 있다.
그중에 가장 일반적인 것이 헌신의 방법으로서,자기의 몸과 마음을 신이나 스승에게 완전히 내맡기는 무조건 헌신이 가장 두드러진다.

또한 헌신의 방법이 가장 쉬운 방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세기에 와서는 이러한 무조건적인 헌신의 방법은 무지한 방법으로 오인되어 별로 인기가 없으며, 과학적인 분석개념이 발달해서인지 지성적 분별작용을 활용하여 믿음으로 발전하는 방편을 많이 활요하는 것 같다.

따라서 고대의 여러가지 가르침이나 개념적 이론을 물리,천체,화학등의 과학이론으로 해석해서 지성적 믿음을 갖게하는 방법도 있다.
육체의 동일화 과정을 해소하는 방법 중에 라마나 마하리쉬가 활용하던 자기 장례식을 스스로 상상하는 방법도 있다.

필자도 이방법을 잠간 써 본적이 있는데, 자기가 죽어서 병원에 실려가고,가족들이 통곡하는 장면,친구들과 친척들이 조문오는 광경등을 상상하며,화장터에 실려서 가고, 다시 화장한 다음 가족들의 오열 속에서 이름모를 산하에가루가 뿌려지고---. 등등을 상상하면서 처음에는 혼자서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명상한다는 것이 아니라,자기장례식 구경하느라 눈물을 많이 쏫아 냈는데, 그런 상상을 하고 나니깐 좀 속이 시원하고 가벼운 마음이 들긴 들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상상력으로 생각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큰 효과는 없지만,
그런대로 육체에 대한 자기집착을 없애는데는 기분상으로 약간의 도움이 된 것도 같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방법을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앞으로 해야할 자아탐구는 생각을 멈추어야 하는 수행인데, 이러한 상상력을 동원한 이미지 명상법은 자칫하면 심상에 집착하는 습관을 들여서, 앞으로의 자아탐구에 큰 장애요인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기 죽음이나 자기장례식 명상법은 인도나 티벳에서는 아주 중요한 명상법 중의 하나로서 체계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여하튼 육체의 자기 동일시가 바로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고 구속되어 있다는 가장 중요한 장애라는 것을 항상 명심해 두기 바란다.

필자가 항상 추천하는 자기 동일시 해소 방법은 자신은 무한한 의식 또는 앎이라고 생각하면
육체의 동일시가 의식의 동일시로 변경될 수가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강조하고 싶다.

이 의식의 완전 동일시도 어렵지만 결국은 그 의식의 동일시마저 없어지는 것이 최종 깨달음인 것이다.

그러나 우선은 자기자신이 무한한 우주적 의식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믿어 버리면, 처음에는 생각으로, 그다음에는 확신으로, 그 다음에는 바로 그 무한한 의식으로 확장되어,완전히 의식과 동일화 되면 그것이 바로 아트만, 신이 되는 것이다.

그 순수존재의식과 하나가 되면 이내 "나"가 사라지면서 최종 종착지에 가는 것이다.
(정확한 표현은 "늘 순수 존재의식 자체"였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완전 순수의식이 되기 까지는 끊임없는 자기 탐구가 필요하게 된다.

다음회에는 지금까지 서론을 마치고 <2.이것들이 내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인가?> 하는
자아탐구의 본론으로 가서 실질적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어떠한 자세로 탐구해야 되는 가를 이야기해 보겠읍니다.

9.

전번회에서 "나는 누구인가?"탐구를 처음에 시작하는 기본 마음의 자세를 어떻게 잡고 시작해야
되는지를 간단하게 이야기해 보았다.
즉, 나는 육체와 감각기관,생기,마음등이 내가 아니므로 , 나는 누구인가? 자문할때에 이"나"를 "무엇"에 기준을 두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이다.
이때의 "나"라는 것은 "나라는 생각, 또는 내가 있다"는 느낌인데, 이것은 모든 말과 생각과 마음 넘어에 마음으로서는 알수 없는 내면의 "어떤 것"인 것이다.
마음에서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육체의 존재느낌을 대상으로 "나"라고 여겨서 이"나"는 누구인가? 묻는다면 의식 넘어로 넘어가지 못한다.
그런데 과연 알수 없는 "어떤 것"인 나를 어떻게 느끼며 묻는다는 말인가?
"내가 누구인가?" 묻고 있는자는 지금 마음에 느끼고 있는 "육체의 존재느낌"인가? 아니면 마음 넘어에 있는 알수없는 "어떤 것"인가?
마음을 어떤 것으로 비유할때에 보통 거울을 비쳐 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비유들하고 있다.
우리들 마음표면에 나타나는 시간과 공간을 비롯한 모든 삼라만상과 심리현상은 거울표면에 반사된 영상이라고들 비유한다.

즉, 마음이라는 거울에 비친 이미지이지 실체는 아니라고 한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마음의 거울에 비쳐진 이미지들인 것이다.

이런 감각과 마음의 이미지들은 우리들 시선 앞쪽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나타난 현상은 모두가 마음의 거울에 비친 상이며, 육체,마음의 느낌도 모두가 거울에 반사된 상과 같이 허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면 나(의식자체)는 거울앞에 서 있지만,실질적으로 거울 속에 있지가 않고, 거울 밖에 있는 것이다.

즉, 마음의 거울에 나타난 이미지들을 보는(아는)것이 나이지, 마음의 거울에 나타난 이미지 자체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보는(아는) 나자체는 보이지도 않고 알수가 없는 것이다.

눈이 다른 대상은 볼 수 있어도 눈자신은 볼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기가 아닌 자기와 다른 것만 볼 수 있을 뿐이지 자기자신은 전혀 볼수가 없다.
그러면 내가 있다는 것을 나자신이 볼 수가 없는데, 내가 있는지 어떻게 아는가?
바로 대상물을 보고, 알고 있다는 자체가 내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마음과 육체,세상을 보고 알고 있는 나는 이 모든 것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볼 수가 있는 것이고, 이 마음,육체,세상을 알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내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나를 찾다보면 , 그찾는 나(에고)는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만다.
여기서 나라는 것은 바로 의식인데, 그것이 바로 앎인 것이다.
이 "나라는 앎" 또는 "내가 있다"는 것을 아는 앎은 전면에 나타나는 보이는 대상이 아니라,
보는자인 것이다. 즉, 개인의식에 대한 1차적 주시자이다.
"내가 있다"는 앎 또는 의식은 전체 우주적 의식(앎)이되 모든 삼라만상의 모양과 색갈과 특성등의 경계구분이 사라진 전체가 백지상태의 통짜 앎인 것이다.
다른 말로 空같은 순수앎이라고도 하지만, 바로 순수존재의식상태라고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순수의식(앎)이 개인의 마음과 의식에 의해서 나타난 현상세계의 1차적 주시자이지만,

이 1차적 주시자는 개인의식과 의식의 근원인 참나사이의 중간의식이며, 그뒤의 2차적 주시자가 바로 최종 의식의 근원인 참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참나는 말이나 개념으로 풀어서 표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통상 수행상의 언어소통상 표현 할 수 있는 1차적인 주시자인 순수존재의식까지만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보통 이야기하는 신의식, 순수의식이 바로 이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을 말한다.

라마나 마하리쉬가 말씀하시는 "나"란 바로 이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을 말한다.

그러나 수행자가 상근기로서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에 이른 사람에게는 드물게 그 넘어의 절대의식에 대하여 알려주는 경우도 있다.

왜 마하리쉬가 그렇게 수행자의 상태에 따라 달리 말씀하시는가 하면, 개인의식에서 못 벗어난 사람들에게는 절대상태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우선 중간 목표인 우주적 자아의식인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을 가르쳐 주지만,
이 순수존재의식에 가까이 접근한 사람들에게는 그 순수존재의식을 주시하는 최종 진아를 가르쳐준다.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가르침의 수준을 적절하게 조정하여 보여준 것이다.
원래 이 "나는 누구인가?"자아탐구법은 "내가 있다"앎의식이 된 사람에게 해당되는 고급 수행법이다.
다른 말로 자신이 육체가 아니라는 육체동일시에서 벗어난 상근기 수행자들이 의식 넘어로 넘어가기 위한 수준 높은 수행법이다.

물론 선불교의 화두선도 육체 동일시 조건에서 벗어난 수행자들이 하는 수준 높은 수행법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러한 기초적 육체의 동일시해소를 하지 않고 바로 자아탐구법이나 화두선을 직접 행함으로서 초기부터 수행에 대한 난관에 부딪쳐서 중간에 수행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육체 동일시로 부터 벗어나서 자신이 바로 앎(의식)자체이며,모양도 없고 성질도 없고크기도 없는 의식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수행자에게는 아주 효과를 담박에 얻어낼수 있는 둘도 없는 수행법이다.

자- 그러면 실질적으로 수행할 때에 좀더 효율적으로 행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예를 들어 몇가지 이야기해 보겠다.
나는 마음도 육체도 감각기관도 아니다.
그러면 이육체와 마음과 감각기관에 나타나는 이세상을 아는 이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마음 속으로 전제조건을 세우고 나는 누구인가?탐구를 할 수도 있다.
또한 간단하게 이 모든 나타난 것을 아는 이 아는 나는 누구인가?
아니면 이 모든 우주삼라만상과 마음 육체를 아는 이 앎은 어디서 부터 나왔나?
하고 앎의 근원을 추적해 보는 것이다.

나라는 말을 전체 앎으로 대치해서 이 앎(깨어있음)은 어디로 부터 나왔나?하는 물음도 효과가 있다. 이경우는 내가 바로 의식, 앎이란 사실을 확고하게 이해해야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누구인가?하고 묻고는 마음에 무슨 이미지나 느낌이나 경험이 나타나는 가를 기다리는 기대감을 갖는 것은 아주 잘못된 점이다.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묻고는 마음의 반응(답)을 구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은 답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마음에 어떤 응답이 나오는 가를 기다린다는 사실은 의식 넘어로 넘어가기는 커녕, 마음 범위안에서 계속 다람쥐 체바퀴도는 것과 같다.

이 자아탐구법은 바로 알수 없는 의식의 내면 깊은 곳으로 넘어가기 위한 ???질문만이 있을 뿐이다.
그 질문을 하는 에고가 없었질때에야 바로 질문자체가 사라지면서 모든 것이 하나되는 것이다.의문과 묻는자인 에고가 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때는 답을 구하고자하는 의문도 사라지기 때문에 결국 그 답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문제에 대한 부분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으로 나타난 답이 아니라 문제와 문제를 제기한 에고가 몽땅 사라지는 전체적 사라짐이 실제적인 답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즉, 나라는 말이 나오기 이전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묻는자는 나라는 말이 나오기 이전에 있었으며,나는 누구인가,어디서 나왔나?하고 참나를 찾는다는 것은 결국엔 찾는 나가 찾을 나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마치 뱀이 자기꼬리를 다른 먹이로 생각하여 자기 꼬리를 입에 물고 뱅글뱅글 돌아가는 형상과 비슷한 행태가 바로 우리가 하고 있는 수행인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나는 누구인가..나는 누구인가...결국 답을 찾고보면,깨어나서 보면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물을 찾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저 마음의 중얼거림이 점차 사그러지면서 고요해지면 이제 서서히 탐구의 효과가 나타난다고 볼 수가 있다.

에고인 나가 슬며시 꼬리를 감추며 사라질때 나의 모든 소유물들과 주변관계에 관심이 사라지고 항상 지금여기의 내면인 현존 속에 자리잡기 시작한다.

화두선도 그렇지만 자아탐구법도 ???의문 뒤의 모름 한가운데 안정되게 자리잡고 들어가 앉아 있으면 알고 모름의 밑바탕인 순수의식속에 잠기게 된다.
그런데 이 의문, 모름을 끊임없이 유지해야만 의식(앎)넘어로 넘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하는 자는 에고이지만,일단은 이 에고의식이 전체 순수앎(空)을 거쳐서 지나가야 하며,말로서는 앎이라 표현했지만 ,실은 느낌적으로는 모름과 비슷한 깜깜한 느낌이지만 완전히 확 트인 개방된 모름인 것이다.

그 존재앎을 거쳐서 이어서 완전히 꼼짝할 수 없는 점 속에 틀여박힌,아니면 바위속에 박힌 보석처럼 팔방이 완전히 꽉 막혀버린 답답한 상태(존재핵,점)를 거쳐서 끝없이 깊은 천길 낭떠러지 밑으로 추락해 "나"가 죽어 한동안 깨어 있는채 까무러쳐 보아야,무한한 나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답이 없는 순수한 우주적 의문??????만을 유지해야한다.

만일 수행 중에 어떤 잡념이나 망상이 흐르면 빨리 자각하여, 이생각이 어디로 부터 오는가? 묻는다.
물론 이 생각들은 (알수 없는)내면의 나로 부터 온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하고 다시 자기 내면 깊은 곳을 향하여 묻는 것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을 끊기지 않고 계속 유지하는 것이 수행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다음회에도 계속 자아탐구법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겠읍니다.

10.
전번회에는 "나는 누구인가?" 자기 물음에 대한 자세를 어떻게 잡고 행하여야 할 것인가를
이야기 해 보았다.
실지 전번회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라는 것을 모든 마음 넘어 "모름"속에 넣고 그 "모름"을 유지하는 의문만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은 어느정도 수행을 한사람 들에게는 쉽지만,
처음으로 자아탐구를 시작한다든가, 수행경력이 얼마 안된 구도자들은 처음부터 이런 자세를 유지하며 수행하기가 쉽지가 않다.
왜 그러냐 하면, 기본적인 개념자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아직 육체적 느낌을 자신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육체적 느낌을 "나"라는 대상으로 바라보며 이 나는 누구인가?하고 묻기 때문이다.
따라서 항상 "나는 누구인가?"의 의문문을 하기전에,

"나는 육체도 아니고,느낌(감각)도 아니고,마음도 아니다"라는 개념을 확실하게 익혀야 한다.

예를 들어 그냥 "나는 누구인가?" 할 경우는 이 "나"라는 것을 육체느낌이나 마음의 현존느낌을 바라보며 하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먼저 나는 육체도 아니고,느낌도 아니고,마음도 아니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했을 때는
명확하게 마음 넘어로 넘아가는 의심이 유지된다.
문제는 묻고나서 마음이나 느낌에 무언가가 나타나나 하고 기다리지만 않고, 그 의심을 계속 유지만 한다면, 그것이 마음넘어에서 유지가 된다고 볼 수 있지만,
대부분은 그 의심 유지상태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마음의 심상을 볼려고 한다든가, 다른 생각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런 다른 생각이 나타날 때에 빨리 알아차려서 다시 나는 누구인가? 하고 의심 속에 들어감으로서 잡생각의 꼬리를 끊어 버려야 한다.

만일 생각(망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달고 이미 길게 진행된 상태에서 뒤늦게 알아차렸더라도,
이생각들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 나왔지? 하고 의문을 던저서, 그 의문의 꼬리뒤에 아무것도 없는 무심상태를 붙잡아야 한다.

그런 다음, 그 모르는 의식넘어에서 망상이 나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음, 나에게서 나왔군, 그럼 이 나는 누구인가?하고 의문 속에 묻혀서 망상이 안나오도록 의문으로 생각의 굴속을 꽉 막아 놓으면 항상 의문만을 유지 할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은 생각의 흐름을 계속 관찰하라는 말도 하는데, 이런 말은 듣는 사람에게는 잘못된 이해하여 엉뚱한 사색형태로 될 수가 있다.

생각의 흐름을 관찰하라는 말은 생각의 흐름에 자기가 말려서 휩쓸리지 않고 멀찍히 떨어져 있는 상태가 되라는 말이지, 생각의 흐름에 주의를 주어서 그것을 구경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생각의 흐름은 일단 생각에 관심이나 주의를 주면, 그 관심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아서 더욱 생각이 왕성하게 커지면서 급기야는 그생각에 말려들어서 휩쓸리고 만다.

말하자면 그 생각의 흐름에 자신을 동일시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생각의 주인공이 되어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생각 속의 세상에서 헤메게 된다.
따라서 생각의 소용돌이에서 헤어 나오려면 그 속에 빠져 버린 만큼 힘들게 된다.

생각이 흐르는 강물 밖에서 나와는 상관없이 지켜 보려면 생각의 움직임과 동일시되지 말아야 한다.
생각이 나오는 초기에 바로 알아 차리면 쉽게 생각의 고리를 끊을 수가 있으나,
그생각이 커져서 이미 내가 생각 속에 빠져 버리면, 자기가 생각 속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정신 차려서 생각의 고리를 바로 끊거나 ,잠간 다른 환경을 만들어 주므로서 생각을 멈추게 해야 한다.
즉, 눈을 크게 떠서 정신을 바짝 차린다든가, 잠간 명상을 그만 두든가, 가벼운 체조 등으로분위기를 바꾸고 다시 시작한다.

일단 자기가 생각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바로 깨어나겠지만, 그렇지 않고 생각 속에서 두둥실 떠서 생각의 파도를 즐기면 깨어있는 꿈속에서 허송세월 보내는 꼴이 된다.
그런데 생각의 흐름은 여러가지 육체적 생리조건에 의해서 많이 좌우된다.
생각은 사람이 의도성으로 하는 것 같이 착각하지만 실지로는 저절로 흐르는 동적 파동의식의 자연 흐름이다.

생각의 흐름이 바로 의식상의 생기파동의 자연적인 움직임이다.

육체의 생리적 활동생기의 변화가 일부 마음 속에 영향을 주어 나타나는 생기의 변화작용이다.
그것은 육체와 심리 양면에서 상호간 역동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어 그 흐름의 움직임이 거세거나 조용하거나 항상 흐르고 있다.

대개 마음 속에서 흐르는 생각이 거칠고 공격적이거나 소위 나쁜 생각이나 원망하는 마음등
네가티브(마이너스)적인 생각의 흐름은 육체의 장기 활동이 활성화되는 경우에 나타난다.
보통 식사시간 중에 소화기관이 활성화되는데,이때에 가만히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생각의 흐름을 살펴 보면 대개 지나간 사소한 일들에 대한 안좋은 인상에 대하여 마이너스적인 망상들이 나타난다. 어딘가 장이나 위, 기타 장기가 안좋을 때는 특정 형태의 생각의 흐름이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위가 안 좋을 경우는 남을 비난하는 생각이 주로 나타난다든가, 장에서 가스가 많이 찼다든가,설사증상이 있을 때는 우울증 비슷한 생각의 흐름이 나타난다든가,하는 장기마다 특정 형태의 감정으로 색칠된 생각이 나타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특정형태의 생각의 흐름을 관찰하면 육체의 어떤 부위의 고장상태를 알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생각의 흐름이란 육체적,심리적 조건에 의하여 저절로 나타나 흐르는 것이지, 자신이 그 생각의 흐름과는 별도로서,생각의 흐름에 휩쓸리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명상 중에나타나는 생각의 흐름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항상 의식(앎) 넘어 모름 속에 있었야 하며, 이 모름 속에 안정적으로 ,그리고 더 깊은 모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깊은 의문"을 계속 유지하는 방법이 바로 자아탐구법과 선불교 화두수행법이다.

라마나의 자아탐구법은 그 의문의 대상을 바로 "자기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가장 직접적인 나에 대한 의문이다.

육체의 특정 부위에 주의를 집중한다는 것은 육체의 동일시를 촉진하는 결과가 되므로
이런 육체의 특정 부위 집중은 무시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주의할 사항은 육체의 특정 부위 집중에는 자아탐구법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자아탐구법은 오직 의식 넘어로 넘어가서 안정적으로 의식넘어에 안주하는 것이지, 육체의 특정부위 집중(단전호흡,요가등)은 의식입장에서 육체를 인정하는 것이므로, 자아탐구법의 기본 원리에도 어긋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하리쉬가 첫번째로 강조하는 것은 "진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모든 종교나 정신수행체계에서는 이 "믿음"을 최우선적인 조건으로 꼽는다.
그 가르침 내용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구도에 대한 열망을 강력하게 지속시키어, 어떻한 장애가 닥칠지라도 헤쳐나갈수 있는 추진력을 가지고 목표를 향해 매진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라마나 마하리쉬의 자아탐구법으로 수행하는 수행자는 기존 라마나 마하리쉬의 대화록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거기서 가르쳐 준대로 꾸준히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라마나 마하리쉬는 근세기에 직접 나타난 깨달은 성자이고, 그 대담록이 생생한 현대어로 번역되어 있으므로 어떤 경전이나 가르침보다도 신선감과 신뢰성이 있으며,
특히 현대인의 의식수준에 적절하게 표현된 가르침이 많으므로 믿음자체가 저절로 일어 나기가 쉽다.
그러나 이 자아탐구법은 처음 책을 대할 때처럼 실지수행에는 그렇게 쉬운 수행법이 아니므로이런 수행을 하는데,사전 자기육체 동일시 개념이나 의식과 마음에 대한 개념을 확실히 이해하여야 쉽게 진입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면을 참작하여 자아탐구를 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샛길로 빠질수 있는 몇가지 실례를 들어 그에 대한 방편을 이야기해 보았다.
만일 본글을 읽고 마하리쉬의 가르침과 다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라마나 마하리쉬의 가르침 글만을 따르기 바랍니다.

11.

이번회에 라마나 마하리쉬의 자아탐구법에 대한 수행이야기를 마지막회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는 누구인가?" 자아탐구법의 기본 핵심은 에고인 "나라는 생각"이 어디로부터 나오는가를 쫏아서 탐구하는 과정으로, 탐구중에 "나라는 에고"가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즉, 어떤 마음이나 경험상의 변화에 관계없이 의문하는 자인 "나"가 사라지면서, 의문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상의 어떤 답이나 경험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사라지는 것이 바로 답이라고 할 수가 있다.

반대로 "나는 누구인가?"의문이 일어나는 한에는 에고가 아직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사라진다고 절대진아에 도달된 것은 아니다.
절대참나라는 것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지,어떤 의도적인 수행의 결과로써 새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원래 전부터 있었왔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있는 것이 참나인 것이지만,
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아탐구로 에고의식이 녹아지고 순수의식이 되므로서,
영원하고 무한한 참나에 접근해 있으므로 어떤 기회에 그 참나를 알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참나를 안다는 것은 다른 말로 참나 자체가 된다는 말이다.
"나"가 바로 참나라는 진지(眞知)의 광명(빛)에 가장 가깝게 접근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빛(의식)의 근원인 태양에 접근했을 뿐이지, 아직 태양 속으로 녹아서 사라지지는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미세한 자아의식의 습들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수행을 쉬고 순수존재의식상태에서 그대로 가만히 "있음"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 있음"인 것이다.
이때에 강력한 태양(절대참나)의 빛에 서서히 남은 미세한 원습(原習)들이 녹으면서 예기치 못한 기회에 바로 절대깨달음의 삼매상태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자아탐구의 결과로서 바로 절대참나가 되는 것은 아니고, 일단은 "내가 있다"는 순수존재의식상태를 겪는다는 사실이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이 "내가 있다"는 순수존재의식을 진아나 마찬가지라고 언급하시고 있다.

이 "내가 있다"순수존재의식은 바로 우주적 자아의식이지만, 아직도 "나"라는 미세의식이 남아 있는 상태라고 볼 수가 있다.

대부분의 깨달았다고 하는 수행자들이 이 우주적 자아의식인 존재의식상태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머문다고한다.
그러다 보니 이상태를 깨달음의 최종상태인 참나라고 여기는 가르침들도 많이 나와서, 그렇게 아는 구도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라마나 마하리쉬는 이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 넘어에 진아가 있다고 가르치며, 존재의식은 뚜리아라고 하며, 그뚜리아 넘어에 참나인 뚜리아 땃따 라는 것이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특히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는 이 존재의식 넘어 참나를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스승이다.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자아탐구 수행법으로 육체 동일시된 에고를 버리고,
"내가 있다"는 순수존재의식이 된다음,
"내가 있다"는 앎의식이 그 본체인 "있음" 속으로 공진되어 합일되는 과정은 바로 자연적인 흐름에 맡겨 버리는 것이다.

그 자연적인 흐름에 맡겨 버리는 수행아닌 수행이 바로
"있는 그대로 있음"상태로 머무르는 것이며, 소위 "여여(如如)하게 사는 모습"이다.
여기에는 조금이라도 의도적인 행위없이 물흐르는 것처럼, 구름 떠다니는 것처럼,
자연의 흐름에 떠맡기는 삶이며, 이러한 무위의 삶의 과정에서 "스스로 있는 참나"가 되어가는 것이다.
자아탐구중에 중요한 것은 이 참나라는 것을 일부로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무심상태나 고요함조차도 상상으로서 생각을 짓지 말아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심자체만 계속 유지 할뿐,
마음넘어에 무심상태나 생각없음상태를 상상할 필요는 없다.

또한 무한한 공상태를 상상할 수도 있는데,
상상자체가 생각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원래 무심상태와 무심상태를 생각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차이만큼 간격이 벌어진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문(自問)은 어떤 답을 눈앞에 나타내 보일려고 묻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생각 그이전에 자기의식의 주의 촛점을 멈추기 위한 수행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어떤 요상한 마음 속의 심상이나 느낌,경험을 기다리지 말고,
항상 마음 넘어 내면 속에 자기 의식의 주의를 넘겨 놓기 위한 수행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더우기 몸도 마음도 아니지만, 이 모든 삼라만상과 몸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 앎느낌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추적해 내면 속으로 잠입하는 수행이므로,앎의 느낌 넘어, 앎자체가 무엇인가를 추적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

그 앎의 느낌이 바로 지금 자기가 나라고 여기는 에고적인 나이므로 이 앎의 느낌이 나오는 곳을 추적해서 그 앎의 느낌이 나오는 앎자체가 무엇이며, 어떤 것인가를 스스로 알아야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것을 말로 숫하게 표현해 왔지만, 실지수행시에 스스로 느껴서 그 앎자체로 바로 추적의 발판이 되어 더욱 내면 속으로 깊히 들어가야 되는 것이다.

출처 : 마음공부와 자기계발을 넘어서 | 글쓴이 : 와룡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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