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매에 관한 소고 잡담

윤달 때문에 한달 늦게 결제 들어갔던 사형이 이제야 하안거를 마치고 나왔다. 강원을 나와 소임을 살다가 이제야 첫 방부를 마친 사형은 나름의 공부 경험에 소기의 성과를 얻은 듯 했다.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다 문득 공부 이야기가 나왔다. 정진은 잘 되는지. 공부는 어떠한지. 선방 노스님들과 나눴던 이야기를 해주던 사형은 문득 내게 이번 한 철 나면서 삼매를 경험했냐 물었다. 삼매가 깨달음의 필수 전제조건은 아닌 것같단 내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사형은 자신이 경험했던 일종의 삼매 체험을 진기하게 풀어놓았다. 공부에 대한 내 견해는 단순히 책에 나오는 이야기로써 일축되었다.

화두를 들었다는 사형은 일념으로 이뭣고를 되뇌였다고했다. 의심은 성성했냐는 말에, 그저 의심없이 주력하듯 화두선(염화두)을 했고 이윽고 며칠동안 기이한 의식체험 속에 몸이 매우 유연해지고 침이 샘솟는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건 차치하고서 그럼 그 경험 이후로 달라진 무언가가 있냐 물으니 그때뿐이었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달라진건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사형은 자신이 경험한 신비한 체험에 매료되어 일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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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불교의 수행 풍토가 이러하다. 서로 공부를 묻는 질문에는 삼매체험이 반드시 포함된다. 왜??... 애초 선방에 앉아 수행한다는 사람들도 자신이 왜 수행하는지 왜 깨달아야 하는지 무엇을 깨닫는단건지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 인생무상과 일체개고의 진리를 바탕으로 진지하게 구도하는 이는 그 수가 적은 듯하다.

수행이라는 것을 자신의 삶 안에 포괄되어지는 일종의 액세서리 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수행과 깨달음에 대한 적확한 목적의식이 없으니 당연히 기이하고 신비한 체험에 매료되기 마련이다. 혹은 깨달음이란 것을 막연한 신비체험에서 오는 아주 특별한 경지로 여기기도 한다. 그렇게 깨달음은 도달할 수 없는 신비의 경지 초인초극의 경지로 포장되어진다.

하지만 삼매와 깨달음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이다.. 일시적 의식 상태의 변화가 깨달음에 이르는 통찰에 보조적 역할을 하거나 혹은 부수적으로 딸려올 순 있어도 그것이 깨달음의 본질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문제이다. 때문에 초기불교에서는 선정 없이도 통찰지를 개발하여 아라한이 되기도 하고, 선종의 소의법문이라 할 수 있는 육조단경에서조차 '오직 견성을 논할 뿐 선정을 통한 해탈은 논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의 실상을 파헤치려는 노력 없이 좌선을 통한 깨달음, 선정 지상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합류하여 온 인생을 다 바친다... 그러나 일시적인 체험은 무상한 것이다. 아무리 깊고 깊은 삼매도 깨어나면 그뿐인 것이다. 여전히 삶은 계속되고, 죽음은 시시각각 다가온다. 나는 여전히 존재하고 세계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 평생을 삼매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면 그는 언젠가 삼매를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이천오백년전 석가가 그러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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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란, 견성이란. 어떤 깊은 의식 상태에서의 변화가 아닌 바로 이 일상 의식. 지금 살아가고 있는 바로 이 의식 상태에서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전도된 망상을 바로 잡는 것, 오해를 푸는 것, 제대로 이해하는 것. 언어로써 언어를 여의는 것. 때문에 견성은 돈오다. 그것은 점차적으로 선정을 닦아 이뤄나가는 점오도 아니요 변성의식도 아니며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의식 위에서 벌어져야만 하는 돈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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